24-25면/[윤은호 박사, 장애문화예술 현장을 가다]ACEP 2022로 살펴보는 발달장애인 문화예술의 미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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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2-06-15 11:36 조회927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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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은호 박사, 장애문화예술 현장을 가다]
코로나19 오미크론 감염 확산으로 인해 아직까지도 사회적 거리두기가 한창이던 지난 1월,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이 두렵기는 했으나 집을 나섰다. ‘발달장애인’으로서 문화예술이라는 것에 발을 붙여놓게 된 상황에서 반드시 가지 않으면 안되는 전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장애문화예술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던 나마저도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ACEP 2022가 보여준 막대한 파급력 때문이었다. 후원사였던 매일경제가 계속해서 쏟아내는 보도량도 보도량이거니와 윤석열 대통령 등 다양한 정치인들의 참석 사실이 보도되면서 발달장애인에 대한 관심을 끌어내는데 큰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ACEP는 예술문화 교환 프로그램(Art and Cultural Exchange Program)의 줄임말로 한국발달장애인미술연합회가 EU 소속 장애 작가들과의 예술 교류 프로그램으로 기획해 2020년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동안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국제 교류가 어떻게 이어질지 알 수 없던 상황에서 2022년에는 우선 국내 작가들의 모습이라도 담기 위해 시작한 것이 이번 전시회였던 모양이다.
전시회장은 예술의 전당에서 가장 안쪽에 위치한 서예미술관에 위치해 있었다. 모든 것이 정상임을 확인하고 전시가 이뤄지고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입구부터 이것이 ‘발달장애’ 예술 전시회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단서가 있었다. ‘꿈, 열정, 우리 모두의 선물’이라는 슬로건을 주위로 작품에 참여한 장애예술가 사진이 죽 붙어있었다. ‘왜 저래야 했을까’라는 생각부터 들었다.
작가의 사진을 싣는 행동은 장애예술이 아닌 일반 시각전시장에서는 작가 회고전이나, 작가가 직접 퍼포먼스를 진행하지 않는 이상 찾아보기가 힘들다. 지난 번 〈소소한 소통〉이 쉬이읽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전시장에서도 수많은 작가들이 전시를 이어갔지만 작가의 얼굴을 보지는 못했다. 혹시나 해서 최근 NFT 작가님들의 전시를 볼 기회가 있어서 인사동에 온 김에 전시관들을 돌아다니며 전시를 보았다. 역시나 작가의 사진이 걸린 곳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입구에서 입장권을 구매했다. 일반인은 1만 원인데 ‘장애가 심한 장애인’은 동반자까지 5천원이라고 한다. 생각보다 많은 돈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설 수는 없었으니 돈을 내고 입장했다. 문득 ‘이 전시회에 자기 돈을 낸 발달장애인은 얼마나 됐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입장권을 들고 들어선 전시장 입구에는 한 예술 칼럼니스트의 평론이 적혀 있었다.
“작가가 되는 데 자격증을 필요로 하지 않기에 진입장벽이 없다. 많은 이들이 작가라고 주장하며 상호 서슴없이 작가라는 호칭을 붙인다. 작품이 전시장에 걸리면서 작가로 불리기를 소망한다. 영혼이 맑은 발달장애인은 이러한 세상의 소란스러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 작가들은 인간으로서의 욕망, 희망, 자연에 대한 경외를 표현하였다. 어쩔 수 없는 이성에 대한 끌림, 성인임에도 여전히 부모의 보호를 받아야하는 미안한 감정 등이 담겨있다. 작가 의식이 발동, 관람객에게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는 사명감도 보인다.”
전시장 안쪽에 들어선 전시물을 보는 순간 답답함이 느껴졌다. 한숨이 나왔다. 정돈된 형태의 이미지, 무언가 이미 결정된 듯한 필체의 작품들은 발달장애인도 이 정도 피지컬은 가질 수 있다고 보여주는 작품들로 가득차 있었다. 전시장에는 “…꿈을 꾸지 않는 화가는 없다”는 격언이 적혀 있었는데, 역으로 물어보고 싶어졌다. ‘이 작품들이 꿈을 꾸면서 그린 작품이 맞습니까?’
그동안 세계를 돌아다보면서 살펴본 자폐당사자들의 작품들에는 이 정도의 정교함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아무래도 컴퓨터를 이용해 정교한 작업을 할 기회가 없어서일지는 모르겠지만, 정교하지 못한 선처럼 보이는 작품들 속에서도 자유도가 분명히 있어보였다. 그런데 이 곳은 달랐다. 보여지기 위해 그려진 그림. 자신의 세계관을 찾을 수 없이 그려진 보기에 멋진 그림. 1mm도 의도에 맞지 않는 표현이 허용되지 않는 전시 작품.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당사자들은 얼마나 고생했을까.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전시한 것이 맞았을까. 확인하고 싶었지만 방법은 없었다.
전시 중에서 테두리가 명확하지 않거나 잘못 그린 것처럼 보이는 작품들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제제 또한 거의 대다수가 자연의 모습이나 사물을 재현한 것이었다. 현재 ‘발달장애 예술’의 고질적인 문제로 사진, 미디어 등 다매체 작품들이 나타나지 못하는 점 또한 이 전시회에서 극복하지 못한 부분이다. 왜 장애예술에서 그림이나 도예가 아닌 것은 작품으로 인정받기 힘든 것일까.
한가지 더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전시장을 세 곳의 공간으로 나누면서 정리하는 곳마다 작가들의 작품을 스캔받아서 임의로 편집한 대형 그림이 걸려있었다는 것이다. 일반 작가의 단체전이라도 작가와 작가 사이의 벽이 명확해서 저런 식의 편집을 시도하지 않을 터였는데, 당사자들의 동의에 이 작업이 이뤄졌는지 궁금해지는 시점이었다.
다행인 것은 이 작품들 중에서 희망이 보이는 작품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강선아 작가의 <포도>는 포도 이미지와 다양한 캐릭터를 결합해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윤진석 작가의 <시계와 화장실>은 방문했던 곳의 시계를 사진으로 찍어 재생산하는 과정을 통해 자폐스러움을 드러내 좋았다. 김기현 작가의 <푸른바다 저멀리>는 제대로 된 추상화로서 접근 방법이 바람직했다. 황성제 작가는 캐릭터를 세밀하게 묘사하는 장점을 가지고 있는데, <함께 가는 길>은 출품작 중 유일하게 입체가 결합된 작품었다.
전시장의 마지막은 ‘작가들’의 동영상과 배웅하는 말이 있었고, 그곳을 지나면 작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남기는 미디어월과 굿즈 판매 장소가 있었다. 장애예술 씬에서 가장 혁신적인 지점이었다. 그동안 장애예술이 판매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쉽지 않았을 터인데, 작품을 재생산해주고 그 수익을 환원하는 작업을 통해 본격적인 ‘장애예술’의 변화를 엿볼 수 있었다.
전시를 보는 내내 안에 있던 부모와 당사자들이 몇 명 있었는데 그들과 마주치지 않았다. 아니, 서로가 서로를 못본척하고 지나갔을 것이다. 코로나로 방문하기 힘든 세상 속에서 부모와 직원, 몇 명 없는 관객으로 채워진 적막한 전시장은 몇 달 후 생기로 가득찼던 많은 갤러리들과 대조된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이 전시에서 나는 새로운 희망을 발견했다. 전시장 입구에 있던 평론은 “새로운 세상은 종종 사회가 보호해야 될 약자로 여기는 이들의 새롭게 뜬 눈으로 변혁되고 바뀐다.”는 말로 마무리되었다. 변화는 보이지 않더라도 조금씩 오기도 하며, 부르짖는 이들의 목소리에 의해 이뤄지기도 한다. 이번 전시회가 내 눈에 답답해 보였을지라도, 이들 작가들의 전시회에서 보인 작은 변화가 누적되다 보면 분명 당사자들이 원하는 제대로 된 장애예술씬이 형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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